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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한·일을 대표하는 교육자와 사상가가 만나다 '인간과 문화의 무지개다리'
홍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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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08 [11:0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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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호와 빛나는 미래를 위한 대담
“서로의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면
세계 평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특히 청년들의 교류는 모두를 잇는 무지개다리가 될 수 있다”
 

(서울=더데일리뉴스) 한일 양국의 교류가 갈수록 빈번해지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뜨거운 한류 열풍 덕에 일본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은 18세기에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통신사 이후 최고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이러한 우호적 분위기를 한때의 열기로 끝내면 안 된다. 또 이러한 우호 관계를 역행하는 편협한 국가주의를 허용해서도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양국 국민이 상호 이해와 신뢰를 돈독히 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아시아의 미래, 빛나는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걸어가야 한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를 맞아 선두에 서야 할 사람은 청년이다. 서로의 차이와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젊은 세대의 교류야말로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어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청년들의 교류는 양국의 역사적인 갈등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을 이어줄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교육자인 조문부 전 제주대학교 총장과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교육자, 종교철학자인 이케다 다이사쿠 SGI(국제창가학회) 회장의 대담을 엮은 이 책은 2005년 3월 일본에서 출간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국어판은 그로부터 약 12년이 지나서 출간됐지만, 오늘날의 한일관계에 비춰볼 때도 시사점이 무척 크다.
 
“한국에서 본 일본, 일본에서 본 한국”

한국 고유의 글자를 ‘한글’이라고 한다. 한글은 ‘만약 우주인이 지구에 온다면 맨 먼저 이해하고 해독할 수 있는 글자’라고 할 만큼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일본에서는 흔히 ‘한글어’라고 잘못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글’은 ‘문자’를 나타내기 때문에 일본어로 말하면 ‘히라가나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세종대왕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민중에게 글자와 교육이라는 빛을 전하고자 ‘한글’을 만들었으며, 반포는 15세기 중반인 1446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반면 이때는 일본에서 무로마치 시대의 전성기가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한자를 흘려 쓴 초서체를 더 흘려 써서 ‘히라가나’가 탄생했다.

‘한글’이 당초에 ‘언문(諺文)’이라 불리며 지식계급의 대접을 받지 못한 것처럼 ‘히라가나’도 초기에는 서민의 언어로 멸시 받았으며 주로 여성이 사용했다.

한글이 동그라미나 직선 등 도형적인 기호로 되어 있는 것은 일본의 ‘가나’와 크게 다른 점이다. 하지만 언어에는 정서와 감정을 전하는 면과 함께 사회적.문화적인 역할도 있으므로 어느 쪽이 더 뛰어난 언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모두 ‘한어(漢語)’와 ‘고유어’를 섞어서 표현한다. 이 때문에 ‘한어’에 서 유래된 말은 한국어와 일본어 발음이 비슷해 친근함을 느끼기 쉽다. 예를 들어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감사’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발음이 비슷해 양국 국민이 모두 이해하기 쉽다. 또 한국어와 일본어는 어순이 비슷하고 둘 다 조사를 사용해서 말을 이어가는 교착어이기 때문에 배우기도 쉽다.

그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은 ‘계절풍적 풍토’에 해당한다. 이 풍토의 특징은 태풍 등 급변하는 기후에 대처하기 위해 ‘가족의 연대’를 중시한다. 하지만 근저에는 아주 다른 토양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대부분의 신부가 신랑의 성을 따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결혼해도 신부의 성이 바뀌지 않는다. 또 한국에서는 혈연 상의 부모 자식 관계를 절대시하는 풍조가 뿌리 깊어 양자나 데릴사위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가문이나 가업을 이을 수 있다면 남이라 해도 양자로 맞는 경우가 제법 있다.

한 가지 설에 따르면 벼농사는 약 7000년 전 중국 대륙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인디카 쌀을 먹는 데 반해 한국과 일본은 자포니카 쌀을 즐겨 먹는다. 이러한 역사도 서로에게 친근감을 갖게 한다.
 
“학생을 제일로 여기는 인간교육과 대학의 사명”

교육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처럼 당연한 사실이 최근 한국과 일본의 교육현장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입시전쟁’ ‘성적지상주의’의 폐해는 오래 전부터 문제시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인터넷 등 교육의 정보기술(IT)화에 따른 해로운 현상도 생겨나고 있다.

인터넷은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 가치가 충분히 발휘되지만, 인간적인 사고(思考)를 없앤 채 인터넷이 ‘목적’ 자체가 되면 여러 폐단이 발생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학생 제일의 교육’이란 학생들의 방종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려는 의욕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는 취직에 유리한 학과를 지망하려는 경향이 강해 ‘학생을 위한’ 교육이 자칫 ‘취업을 위한 교육’이 되어 버린다.

이로 인해 취직에 불리한 학과는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취직의 유리함을 따져 학과를 선택하는 상황은 일본에서도 자주 보이는 풍경이다. 취직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일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고 세계에 공헌한다는, 고귀한 인격을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21세기의 교육을 위해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개혁에 나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한 개혁인지 알지 못한다면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거나, 재능을 개발하기 위한 교육만 남게 된다. 학생들로 하여금 세계평화를 향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평화교육’의 이념을 실천해야 한다.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평화의 문화를 구축해야”

오늘날 물리적인 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좁혀졌다. 앞으로의 과제는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국가와 국가도 ‘마음의 교류’를 통해서만 건설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국가와 국가뿐 아니라 사회와 사회, 사람과 사람 간에도 마음의 거리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재일 한국인 문제다. 재일 한국인을 차별하면서 공생을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사회를 지배한 것은 무력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인간의 정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서로의 인간적 향상을 위해 정성껏 교류를 지속해야 한다. 아무리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서로를 향한 마음, 인간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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