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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칼럼] 협상은 균형의 힘이다.

2008.07.30 05:26:00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중세기, 유럽은 마치 큰 성당을 지어서 교세의 위용을 자랑하는 것이 절대자를 위한 최고의 가치처럼 생각하였다. 그 어느 날처럼 건물을 짓는 공구들의 소리가 귀에 일상적인 소음처럼 들려왔을 시절에, 공사의 현장에 나온 어느 주교가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당신들은 여기서 무엇을 위해 일하십니까?” 한 인부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한다고 대답을 하였고, 다른 인부는 벽돌을 쌓아 담을 만든다고 말하였고, 또 다른 인부는 하느님께 미사 드리는 사람을 위해 성당을 짓고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위에서 벌어진 일이 중세기에 이루어져서 내려 왔던지, 아니면 현대에 다시 저런 예화들이 구현되던지 간에,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은 세 번째 사람만이 정답을 말한 것으로 생각되어져 왔으며, 다른 두 인부의 대답은 별로 취급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다루어져 왔다. 왜 세 번째 인부만이 정답을 말한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세 번째 인부의 자아도취적인 발언이 노동에 가장 의미를 던져 주는 말이라고 도취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다른 두 인부의 심장 밑바닥에서 나오는 소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처음부터 무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한 사람에게만 집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말고 세 사람 모두에게 비춰서 보았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첫 번째 인부의 경우, 자기가 부양해야 될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삶도 포기하고 산업현장에 나와서 땀을 흘리는 가장의 노고를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사람의 경우, 자신이 오늘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최선을 다해서 멋진 결과물을 남기려는 장인정신의 발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의 경우는 단순한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숭고하게 만들려는 의미부여자이면서, 자신에게 물어 보는 주교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게 보여주려는 노련한 재치 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전체라고 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목소리의 집합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사회에서 언급하는 통합이라는 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는 없고, 천편일률적으로 내야 하는 소리에 자기의 목소리를 섞여야 하는 자유 밖에 없는 것에 불과하였다.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다루었기에, 이 쪽 아니면 저 쪽을 선택해야 하며, 이곳이 아니면 저곳에 있어야 하는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양자택일을 하는 것이어야 했다.

현재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언제부터 먹을거리의 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국민은 촛불을 들고 시위대에 합류하거나 그 시위가 불순세력에 의해서 좌경화, 폭력화 되지 않도록 막거나 해야 하던지, 인터넷 게시판에서 미친 소 추방을 벌이거나 반미의 구호를 높이던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국민의 무지를 공박하거나 세계화의 이름으로 미국과 FTA 협정 타결을 강조해야 한다.

더나가 보수 세력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명빠의 이름으로 정권수호의 운동을 벌이던지 좌파세력의 중추로 생각하는 오빠의 이름으로 정권퇴진 운동까지 거론되는 실정이다. 이 가운데서 어정쩡한 개인적 의견을 밝히게 되면 유명인사의 경우 퇴출운동까지 전개되는 실정이니, 처음부터 개인의 목소리는 목소리 큰 사람들 속에서 묻히게 되어가게 된다.

촛불이라는 것으로 국민의 생각을 가득 담아서 국민적 지지와 견해의 한 형태로 오늘날 문화에 있어서 한 형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고무적이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단적 견해를 표출하는 데에 있어서 새로운 시위문화를 보여주는 실례가 되기에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한 국민적 항의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촛불을 드는 사람들이 모여서 목소리를 낼 때에 조금 더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그것은 요구의 타당성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위의 정당성에 걸맞게 드러나는 요구가 상대방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재협상이라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 간에도 계약으로 인해 거래가 성립한 뒤에 이를 철회하거나 그 내용을 없던 것으로 하고 다시 계약을 맺는 것은 신뢰를 깨는 행위이며, 다소간에 거래를 철회하자는 쪽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물며 국가 간의 약속에 있어서 그 협상내용 안에 재협상이 가능하다는 명백한 문구와 규정이 명시가 없는 가운데 기존의 협상내용을 전면부정하고 다시 협상을 한다는 것은 국가의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 틀림이 없기에 국제 문제에서 이러한 결례를 범하기는 여건상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협상이 없다는 자조적인 말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현대에 살면 자기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수많은 협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에 산다면 다른 사람 부대끼면서 살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반드시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는 실정인 것이다. 현재에도 세계 속에서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협상자리에 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인 것이다.

이런 형편이니 우리가 미국과의 협상결과가 불리하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세계의 변화도 그렇거니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더라도 협상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는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었다. 시민 사회적 입장에서 통합이라는 것은 민주주의 제도에서 국가 쳐놓은 울타리나 주형틀에 맞추어서 나오는 주물이 될 수가 없고, 시민들의 이러저러한 견해들이 다 존중되는 가운데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 조정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통합은 질서와 조화가 있는 가운데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삶에 있어서 개별적인 것도 살리고 전체적인 것도 살릴 수 있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균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근간으로 하여 나는 이 책에서도 협상에서 꼭 필요한 것을 균형이라고 말하고자 하며, 협상에서는 균형의 힘이 협상자나 협상대상자 사이에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한다. 왜냐하면 협상이라는 것이 바로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도움말 ☞ 이 창 호(李昌虎 , 47세) 교육학 박사

========> 이창호 박사 약력

최남연 기자

idaily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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