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참뜻과 수행 그리고 깨달음
2008.09.05 07:27:00
흔히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 불교에서 발원한 용어들이 많다. 예를 들어 찰나, 염화미소, 야단법석 등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불교에서 나온 말들이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불교가 이어져 온 우리나라는 생활 곳곳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자 경서를 처음 펴드는 이들은 불자건 아니건 우선 그 방대함에 기가 질리게 되고 마치 미로에 들어선 느낌일 것이다. 우리가 불교를 안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바를 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불교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이란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신 뜻과 수행 그리고 깨달음의 내용이 곧 불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 북인도의 왕자 싯다르타는 가족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우주만물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고행에 나섰다. 길고 고통스러운 구행 끝에 증득한 깨달음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우선 부처님이라는 말은 붇다(Buddha) 곧 '깨달은 사람(覺者)'을 뜻한다. 또,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의 샤카무니(Sakyamuni)는 산스크리트어이고, 한역으로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고 하며, 석가 또는 석존(釋尊), 불타(佛陀), 붓다 등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중인도 카필라국 성주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탄생한 지 7일 만에 어머니 마야를 잃고 이모인 마하파사파제에게 양육되었으며, 출생하면서 바로 사방으로 7보씩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고 전한다.
유년시절의 이름은 고타마 싯달타. 점점 자라면서 과학 문학의 대요(大要)와 4베다를 배우며, 무예 연마를 숙달한 싯달타는 이후 선각왕의 딸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았으며, 29세에 왕성의 4문으로 다니면서 노인, 병든 이, 죽은 이, 수행승을 보고 출가할 뜻을 내어 하루 밤에 왕성을 넘어서 동방의 람마성(濫魔城) 밖 숲속에서 속복을 벗어 버리고 출가하게 된다.
남방으로 비야리, 마갈타를 지나다니면서 발가바와 아람가람, 울다라 등의 선인을 만나 6년 동안 고행을 한 끝에 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불타가야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크게 깨달아 불타(佛陀)가 되었으며 그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부터 스스로 깨달은 교법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먼저 녹야원에 가서 아약교진여 등 5인을 교화하고 다음에 3가섭, 사리불, 목건련 등을 제도하여 교단을 조직하였다. 깨달은 뒤 3년(혹은 6년)에 가비라 벌솔도에 돌아가서 부왕을 뵙고 친척들을 교화시켰다. 한편 여러 나라로 다니면서 빈비사라, 아사세, 파사익왕을 교화하여 불교에 귀의시키고 북방의 쿠시나가라성 밖 발제하(跋提河) 언덕 사라쌍수 아래에 누워 최후의 교계(敎誡)를 하는 등 45년 동안의 전법생활을 마치고 밤중에 열반에 드셨다고 전해진다. 그 때가 세수 80세였다.
이후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인 서기 4~5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처 열반 후 약 4백여 년이 흐른 뒤이다. 우리나라의 최초불상으로 석가여래 부처님 금불상 53구를 신라 제 2대 남해왕 원년에 지금의 강원도 고성 땅에 이윤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곳은 신라의 영토. 얼마 뒤인 금불상을 금강산으로 이윤하면서 지금의 금강산 유점사에 점안하였고 그 후 왕은 그 사실을 고을 수령 으로부터 전해 듣고 절을 지어 금불상을 모시도록 했으며 그 일이 있은 후 38년이 지난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임시 궁전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며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 오른 6년 후, 서기 48년 7월에 서역(인도) 아유라국의 공주 이라는 여인이 석탑을 싣고 바다를 건너 가락국 해변에 도착하였다. 이에 김수로왕은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고 아들 열을 낳았다. 장남인 은 대를 이어 왕이 되게 하고, 둘째 아들은 허황후의 성씨를 따라 이라고 불리었으며, 그 외의 아들들은 가야산에 입산케 하여 불교와 선도를 수업케 하였다. 이는 곧 호국불교 역사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현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철로는 381년에 세워진 강화에 위치한 전등사이다. 무려 1600년의 한국불교를 그대로 담아놓은 절로써 고구려 소수림왕(381년)때 아도화상(신라에 불교 전파)이 지은 전등사는 원래 이름이 진종사(眞宗寺) 였으나 고려 충렬왕의 아내 정화공주가 나라를 빼앗긴데 이어 원나라의 제국공주에게 남편마저 빼앗긴 슬픔을 달래려 즐겨 찾다가 옥등과 청동수조를 시주했다하여 ‘(왕비가) 등을 전달한 절’ 이란 뜻의 전등사로 바뀌었다.
특히 몽고침입, 임진왜란, 일제치하36년, 한국전쟁 등 수많은 어려움으로 위기 처할 때마다 한반도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호국불교의 정신이었다. 불교로 인하여 훌륭한 문화제가 건립돼 지금까지 문화유산으로 계승되고 있고, 불교의 가르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미물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기리며 전쟁으로 인한 살생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전쟁 속에 스며드는 부처님의 자비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이처럼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종교 특히 동양 불교의 본산이며 1600여 년을 이어온 역사와 전통을 오롯이 이어온 우리나라는 현재 ‘2000만 불자’의 나라임을 감안할 때 불교로 인하여 훌륭한 문화제가 건립돼 지금까지 문화유산으로 계승되고 있고, 불교의 가르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미물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기리며 전쟁으로 인한 살생을 기피하고 나약한 인간이 무너지고 좌절할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희망을 주고 개인이 보다 더 깊이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 본질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부처님의 자비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필자는 이 시점에서 정부의 진지한 해결책이 나와야 당연하지만, 그래도 1600년 역사의 한국불교계 역시 절제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개신교나 가톨릭만큼 국민의 가슴 속 깊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종교간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 있음은 물론 자칫 집단이기로 비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오롯이 1600년 역사의 맥을 이어온 국민의 중심 종교인 호국불교.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날마다 사회면에 장식되는 패륜적 사건·사고들이 각종 매스컴을 가득 차고도 넘친다.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이 서로를 서로 등 떠밀어내고 있고 사찰의 몸집을 불리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가.
문득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추앙을 받아 온 성철 큰스님이 1981년 조계종 종정직을 수락하고 추대식장에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신 채 남긴 법어 생각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법어는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화두로 남아 자기성찰, 깨달음에 대한 강조이리라.
오곡이 풍성한 한가위를 맞아, 부처님의 자비실천을 함양해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어려운 중생을 제도화하고 국민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과 선행을 베푸는 작은 손길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점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일그러진 스님들 표정이기 보다는 온화함으로 묵묵히 지켜보는 게 참된 진리임을 깨닫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신 뜻과 깨달음의 내용이 곧 불교의 가르침임을 되새겨 보아야 할 때이다.
도움말 ☞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 노재환 교수
*********약 력***********
▶ KTA 한국전통 과학 아카데미 학술위원
▶ [사]역리학회 중앙본부 학술위원
▶ [사]역술인협회 중앙본부학술위원
▶ 한국불교 태고종총무원 중앙회 전법사
▶ 뉴스피플선정 2008명리학부분 대상수상
▶ 저서: 명리학교본
▶ [현]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 명리학 교수


